학문 [자료] 데이비드 하비, 볼티모어에 대한 언급

2024-12-01 02:18:11 | 조회수: 13 | 좋아요: 0

예전부터 데이비드 하비가 종종 볼티모어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들었다.

잘 아는 것처럼 데이비드 하비는 영국 브리스톨 대학에서 지리학을 가르치다가 볼티모어에 있는 존습홉킨스 대학으로 이직하게 된다(1969).

그 시기는 1968년 볼티모어에서 폭력 시위가 있었던 시기이다.
(보다 객관적이고 자세한 설명은 여기)

이 시위를 인종문제가 아닌 빈곤문제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렇다면 시위 직후 존스홉킨스 대학에 부임한 데이비드 하비는 여기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1969년 브리스톨에서 '지리학에서의 설명'을 집필하고, 계량지리학을 집대성했던 그가 여기에서 마르크스를 강독하기 시작했던 것과 이러한 시각이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또 드는 생각은 빈곤문제라고 해서 또 폭력시위, 방화, 약탈 등에 대한 정당화는 가능한 것일까,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1968년 볼티모어 시위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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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는 제2차세계대전 후부터 1968년까지 흑인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백인 20만 명이 볼티모어를 떠난 대신 20만 명의 흑인이 전입했다. 1968년 볼티모어 인구는 90만 명 정도였으며 현재는 60만명으로 줄었다. 볼티모어시는 제조업 시장이 급격하게 무너지면서 실업률과 빈곤율이 급증했었다. 한편 애그뉴 주지사는 1968년 리차드 닉슨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발탁, 1969~1973년까지 미국의 부통령을 지냈다.

1968년 볼티모어 시위
1968년 볼티모어 시위(영어: Baltimore riot of 1968)은 1968년 4월 4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피살 이후

4월 14일까지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벌였던 시위를 가리킨다.


마틴루터킹 목사

한 주 동안 총 6명의 사망자, 700명의 부상자를 낳았으며, 1,000여 개의 상점이 재산 상의 피해를 입었다. 보고된 방화 사례만 1,200건, 체포된 사람은 5,500명에 달했다. 피해액은 당시 기준 1,350만 달러에 달했으며, 이를 2015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7,900만 달러이다.

킹 목사의 피살 이후 볼티모어를 비롯하여 미 전역 약 125개 도시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시위를 벌였으며, 이 중 가장 폭력적인 양상을 띤 곳 중 한 곳이 볼티모어였다.

미 전역에 걸친 소요 사태로 인해 최소 46명의 사망자, 2,600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된다. 당시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미국 육군 제82공수사단을 파견했다.

2015년 볼티모어 시위
2015년에 볼티모어에서는 자본주의 운동이라기보다는 프레디 그레이의 사망에 대한 반응으로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¹. 프레디 그레이는 경찰에 의해 체포된 후 병원에 입원하였고, 그 후 사망하였다.

이 사건은 경찰의 과도한 행동과 인종차별에 대한 국가적인 논란을 촉발하였고, 이로 인해 볼티모어 시내에서는 6일 동안 계속되는 시위가 발생하게 된다.

이 사건을 단순 폭력 시위로 간주하는 기사도 있으니 참고하자.

관련 사진



데이비드 하비 인터뷰 중에서
출처: 데이비드 하비 인터뷰

볼티모어와 같은 특정 이벤트는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퍼거슨과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다른 일들에 더할 때, 그것이 하는 일은 많은 인구가 일회용 인간으로 취급되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사람들이 이것이 시스템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이러한 유형의 사건의 체계적 성격을 강조하여 문제가 시스템 내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 수년 동안 볼티모어에서 살았는데, 지금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내가 1969년에 겪었던 것의 재연이다.

1968년에서 2015년으로 넘어갔고, 상황은 여전히 똑같습니다! '이봐, 뭐가 다 똑같게 유지하지?'

1970년대에 상황을 해결했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나 오늘날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든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 많은 부분이 악화되고 있습니다.

볼티모어가 흥미로운 이유는 가난한 지역에서 일어난 일 때문만은 아니다. 도시의 나머지 부분은 실제로 극도로 부유해지고 고급화되어 실제로 두 개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두 개의 도시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 사이의 격차가 훨씬 더 큰 두 도시가 있으며 모두가 그 차이를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와 한 인터뷰를 읽었는데, 그들이 말한 것 중 하나는 그들은 항상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환경에서 살았지만, 그들이 알아차린 것은 어떤 사람들은 더러운 부자가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왜 그 사람들은 더러운 부자가 되고 나머지는 쇠퇴하거나 그대로 유지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불균형에 대한 분노가 그들을 체제에 등을 돌리게 했다. 이것은 볼티모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마을은 괜찮고, 내 마을은 추락하고 있다.'



결론을 대신하자면
볼티모어라는 특정 지명이나, 특정 폭력 시위가 데이비드 하비의 생각의 방향을 결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볼티모어의 1970년대는 여러가지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이 시점을 전후로 해서 볼티모어의 제조업의 쇠락이 본격화되었고, 폭동 이후 재개발 이슈가 불거졌다. 재개발은 종종 양극화(polarization)을 동반한다.

두 도시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1973년에 하비는 <사회정의와 도시>라는 저서를 쓰게 된다. 1978년에는 Urban process under capitalism 이라는 논문을 쓴다. 사실상 <자본의 한계>의 전신이 되는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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