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대에 1968년이라고 하면, 그저 ‘옛날’이라고 생각되겠지만, 1960년대는 번영의 시기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비극적인 한국전쟁까지 끝나고, 본격적으로 재건의 시기가 시작되었거든요. 혹시 마샬 플랜을 기억하시나요? 세계제2차대전을 끝낸 이후, 케인즈 이론에 따라서 많은 국가에서 ‘재건’을 위한 인프라 투자가 시작되죠. 유럽도 마찬가지였어요. 유럽에 대규모 복구자금을 지원한 것이 바로 마샬 플랜입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미국 경제는 공황과 세계대전을 극복하고 승승장구하기 시작했고, 유럽 역시 미국의 재건 자금에 의해서 빠르게 회복에 성공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냉전 분위기 때문에 언제 다시 전쟁이 일어날 지 모르는 조마조마한 상황도 있었지만(쿠바의 미사일 위기, 1962), 어쨌든 세계는 번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1960년대는 미국의 경제적 지배력이 급속도로 증가하는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의 경제적 번영은 미국이 국제 무역과 금융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했고, 세계 경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에 소위 말하는 ‘석유파동’(oil shock)이 오기 전까지 미국 경제는 승승장구했죠.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주의 혁명’은 할 필요조차 없는 것으로 느껴졌을 것 같아요.
대공황으로부터 세계경제를 구원하는 지혜를 내준 것이 바로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즈였죠. 케인즈 이론의 핵심은 경제가 위기 상황일 때 국가가 재정투자를 통해서 유효수요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의 이론 대로 국가는 경제가 위기에 빠졌을 때, 대규모 자금을 들이 부으면 알아서 시장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들에게 1929년 같은 대공황은 이제 없을 거라고 느껴졌을 거에요. 왜냐하면, 이제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법을 깨달은 것처럼 느껴졌을 거거든요. 이런 느낌이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기까진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 항상 함정이죠. 1970년에는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스태그플레이션’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1970년대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먼저 1968년 전후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까 해요. 사실 1960년대가 평화와 번영의 시기였다고 하지만, 사실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은 측면이 있어요. 1950년대에는 우리나라의 비극이기도 한 ‘한국전쟁’이 있었죠. 한국전쟁은 세계사적으로도 좀 중요해요. 왜냐하면 1950년대는 여전히 전쟁의 불씨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죠. 세계 제 1차대전과 2차대전이 있었는데 3차대전이라고 없으리란 법이 있나요? 그리고 만약 3차대전이 일어난다면, 좀 과감하게 말해서 인류가 구석기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었어요. 2차대전에서 그 위력을 발휘한 핵무기가 상용화된다면, 지구가 날아가는 건 이제 시간문제거든요. 어쨌든 세계대전으로 번질 뻔한 한국전쟁은 1953년 휴전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나서 1962년엔 쿠바의 미사일 위기라는 것이 있었어요. 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냉전 시기에 발생한 중대한 국제 정치적 위기로,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려 한 것이 미국에 의해 발견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과 소련 간의 긴장을 극도로 고조시켰으며, 핵전쟁의 가능성까지 거론되었습니다. 미국은 쿠바로 향하는 선박을 봉쇄하고 쿠바에서의 미사일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결국, 양국은 대화를 통해 위기를 해결했으며, 이 과정에서 소련은 쿠바의 미사일을 철수하고, 미국은 터키와 이탈리아에 배치된 자국의 미사일을 철수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 사건은 냉전 역사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 중 하나였죠.
베트남 전쟁은 또 어떻구요? 1964년 발생한 통킹만 사건은 미국 구축함이 베트남의 통킹만에서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을 촉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나중에 일부 공격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거나 과장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당시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 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세계 최고의 무기로 무장하고, 2차대전 승전국이었던 미국은 당연히 베트남 전쟁에서도 쉽게 승리할 수 있을 줄 알았죠.
베트남 전쟁 동안 미국은 약 270만 명의 군인을 동원했으며, 이 중 대다수가 징병제를 통해 모집된 젊은 병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어요. 결국 베트남 전쟁은 미국 사회에 큰 상처를 안기고 끝납니다. 하지만 1968년은 아직 베트남 전쟁이 한참일 때였어요. 미국 사회는 남의 나라 전쟁에 소중한 젊은이들의 젊음을 바칠 필요가 있는지 반성하기 시작했죠. 1968년은 반전의 분위기가 최고조로 고조되었어요.
업친데 덥친 격으로, 미국 사회의 다이나마이트 같았던 인종차별에 대한 시위도 극심했어요.돌이켜보면 버스에 흑인이 앉을 칸이 따로 있는 것이 말이 되나요? 유색인종만 가는 화장실이 있는 건 또 어떻구요? 1950년대 미국은 그런 문제조차도 해결이 안된, 아직 평등과는 거리가 먼 사회였던 것 같아요. 몽고메리 흑인 민권운동은 1955년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로자 파크스가 버스의 백인 전용 좌석에 앉기를 거부한 사건으로 시작되어,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이끄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으로 발전하며 미국 전역의 민권 운동에 불을 지폈습니다. 1968년에는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된 시기였죠. 데이비드 하비 교수가 부임했던 존스 홉킨스 대학은 1968년 마틴 루터 킹 암살 이후 가장 강력한 무력 시위가 일어났던 도시, 볼티모어였어요.
이쯤 되면, 제가 아까, 1960년대가 ‘평화와 번영’의 시기라고 했던 것이 조금 머쓱하게 느껴지네요. 사실 1960년대는 ‘평화와 번영’의 시기라기 보다는 사회모순이 교차되는 시기였어요. 한 쪽에서는 돈을 쏟아부어서 인프라를 재건하고, 경제는 번영을 구가하는 것처럼 보였죠. 다른 한 편에서는 베트남 전쟁이라는 명분이 약한 전쟁에 미국이 달러를 쏟아붓고, 많은 젊은이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죠. 물론 베트남 사람들도 많은 희생을 겪어야 했죠. 게다가 링컨 대통령을 계기로 노예제가 폐지된 지가 언제인데, 미국에는 아직도 인종차별 문제가 뿌리 깊게 남아 있었죠.
케인즈의 경제이론은 미봉책으로 경제를 재건하는 데에는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사회문제는 꽝이었어요. 자, 그럼 도심 곳곳에 빈곤한 아프리카인들이 모여 살고, 여기서 빈번하게 범죄가 일어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소탕하나요? 재개발하나요? 그런 일은 왜 일어나게 되었죠? 누구의 잘못이죠? 아니,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회 시스템의 어떤 부분에 문제가 있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 거죠? 이런 문제에 대해 누군가는 고민하고 답을 했어야만 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