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우리는 어떻게 입찰지대 곡선이 게토 문제를 설명하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요컨대, 주택은 크게 지대(시장과의 접근성)와 넓이(주거 만족도)가 반비례하는 관계에 있는데, 가난한 사람의 한계효용곡선이 더 가파르기 때문에, 즉 시장과의 접근성에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도심 주변에 살 수 밖에 없고, 중산층들은 상대적으로 한계효용곡선이 완만하게 형성하기 때문에 도시 외곽에 넓은 집을 선호하며, 어느 정도 출퇴근을 감내합니다.
위 설명이 어려우신 분은 여기를 눌러서 지난 글을 읽고 오세요.
이와 같은 설명은 비록 완벽하진 않지만, 제법 많은 것들을 설명해줄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우리가 여러 교과서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아래 그림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해줘요. 도심은 단순히 지대가 비싸서 상업용 지대곡선이 형성되고, 외곽에는 주거용 지대곡선이 형성된다는 것은 알론소 아이디어의 출발점일 뿐이지 도착점이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버제스의 동심원 이론은 게토가 형성되는 ‘동학’(dynamics)을 일관적으로 설명해내지 못했던 것이죠.
『사회정의와 도시』에서 하비는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알론소의 아이디어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죠.
* 참고: 아래 인용구는 모두 『사회정의와 도시』에서 발췌했습니다.
빈민들은 교통에 지출할 돈이 매우 적기 때문에, 이 집단의 입찰지대곡선은 눈에 띄게 가파를 것이다…(중략)… 즉, 빈민은 높은 지대에 살도록 강제된다는 뜻이다. …(중략)… 이 이론은 주택시장에 흔히 ‘파레토의 최적’이라고 하는 상황을 달성하는데 기대고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당시 하비 교수는 마르크스의 이론이 현대 도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시기에요. 그러나 이 글에서도 마르크스의 아이디어를 정면에 드러내지 않습니다. 다만, 엥겔스의 글을 통해서 파크와 버제스와 같은 도시 공간 구조이론이 이미 마르크스 사상에 어느 정도 녹아 있음을 암시하죠. 하비가 언급한 엥겔스의 인용구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나는 어디서나 그리 큰 길에는 열악한 건물보다 번듯한 건물이 많다는 것, 큰 길에서 가까운 땅이 큰 길에서 멀리 떨어진 땅보다 가치가 높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나는 맨체스터만큼 큰 길에서 노동계급을 체계적으로 차단하는 도시, 부르주아의 눈과 신경에 거슬릴 만한 모든 것을 세심하게 감추는 도시를 본 적이 없다(엥겔스, 영국노동계급의 상황, 86-87).
이 글은 알론소의 도시 지대론의 핵심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한계효용곡선과 파레토의 최적을 언급하지 않아도, 당시 최고의 공업도시였던 맨체스터의 상황을 묘사함으로써 도시 지대와 계급의 관계를 포착해낸 것이죠. 아까 알론소의 이야기를 ‘노동자’와 ‘자본가’로 살짝 바꿔보면 어떨까요? 노동자는 도심 가까운 곳에 모여 살면서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생활하죠. 하지만, 자본가들은 출퇴근할 여유가 있기 때문에 도시 외곽에서 공장으로 출퇴근해도 됩니다.
저의 대학원 시절에 이 이론은 근사해 보였어요.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가난한 사람’을 ‘대학원생’으로 ‘부자’를 ‘교수’로 치환해보는 거에요. 제가 아는 대학원생은 거의 학교의 기숙사에 살거나,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서 살았어요. 물론 자기 집이 서울에 있는 경우는 자기 집에서 출퇴근을 하죠.
그런데 교수님들은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살지 않겠죠. 보다 나은 주거환경이 있는 곳에서 출퇴근하는 경우가 많을 거에요. 막 유학 갔다와서 학교에 정착한 교수님들은 대학교에서 머지 않은 곳에서 출퇴근하는 경향도 있어 보였어요. 심지어 학교 안에 신임 교수 아파트도 있었죠. 당시 학교에 막 부임했던 외국인 교수님은 교수아파트에 살았는데, 거기 대학원생을 위한 아파트도 있어서 출퇴근할 때 만나서 수다를 떨면서 가기도 했습니다.
교수님들도 연차가 쌓이고 경제적으로 더욱 안정되면, 굳이 학교 근처에 있을 필요가 없는 거죠. 대학원 시절에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럼 대학원 기숙사가 하비가 말한 볼티모어의 게토가 되는 것인가?”하면서 키득키득 댔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원생은 주로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통학하죠.
당시 하비 교수의 생각은 ‘도시지대론이 공간구조를 설명해낼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도시지대론은 공간구조를 설명할 수 있지만, 그와 같은 공간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를 뒤집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하비 교수는 또 이렇게 지적합니다.
손쉬운 접근은 이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는 메커니즘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때 메커니즘은 아주 간단하다. 바로 토지이용을 위한 경쟁적 입찰이다.
잉? 이것은 또 무슨 얘기인가요? 하비 교수의 생각은 그러니까 도시 입찰지대 곡선을 가능하게 하는 도시 공간구조의 ‘원리’(principle)을 손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원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입찰지대곡선을 가능하게 하는 자본주의적 토지이용이 되겠죠.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자본주의적 토지이용의 반대말은 사회주의적 토지이용이 되나요? 사실 꼭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알론소의 지대곡선은 완전경쟁의 시장 상황에서 가능한 한계효용곡선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부 규제 등의 상황을 정확하게 가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토지시장은 수많은 정부 규제로 인해서 알론소의 지대곡선이 있는 그대로 일어나기는 어렵죠. 우리는 토지이용을 ‘자본주의적’으로 하고 있지만, 동시에 정부는 토지이용을 ‘계획’(planning)하고 ‘규제’(regulation)합니다.
대표적으로 LTV(loan to value)같은 것이 대표적이죠. 주택을 구매하는데 50%만 대출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정부 규제에 해당합니다. 가계 부채가 너무 커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정부는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애초에 입찰지대곡선은 이론 속의 자유 시장 경제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으로서 어차피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모델이라는 것이죠. ‘상상’이라는 말을 통해서 입찰지대곡선의 학문적 의의를 폄하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상상’은 현실이야 어떻든 간에 어쨌든 ‘원리’를 설명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정책’이라는 외부요인이 없을 때 도시는 어떤 원리에 의해서 형성될까 생각해 보는 것이죠.
하비 교수는 자본주의적 입찰지대 곡선 자체를 회의합니다. 도시공간을 배치하는 원리로서 ‘토지 이용의 경쟁적 입찰’을 의심하고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는 이 글의 말미에서 이와 같은 불안정한 상황이 추후 ‘재개발’로 이어질 것임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1970년대 이후 나타나는 부동산 재개발 붐을 예언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렇게 놀랄 만한 예언도 아니에요.
도심에 ‘게토’가 있다고 했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이 게토를 쓸어버리고 멋진 새 건물을 짓는 것이에요. 자본가의 입장에서 이런 대안은 아주 손쉬운 대안이죠. 왜냐하면 앞으로 이 건물에 입주할 사람들은 이 공간을 정비하고 새 건물을 올리는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거든요. 그럼 원래 대로 비싼 ‘상업적 지대곡선’이 형성되는 것이죠. 이와 같은 재개발이 일어나면 게토를 형성하며 살고 있던 원주민들은 어딘가로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되겠죠. 이와 같은 상황은 ‘도시 미관’ 정비라는 명목으로 자본의 힘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선택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올림픽’과 같은 국가 스포츠 행사를 계기로 이런 일이 흔하게 일어나죠. 한국에서는 88 서울 올림픽, 중국에서는 베이징 올림픽 이전에 대대적 도시 미관 개선이라는 이유로 도시 정비가 일어났죠.
목동 철거민의 모습(출처: froma)
이 글은 데이비드 하비가 마르크스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시점에 쓴 글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하비의 엄청난 생각의 스케일에 놀라게 되었어요. 사실 이 글은 한편의 에세이로서 <과학혁명의 구조>를 쓴 토마스 쿤을 비판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지리학으로 눈을 돌려 왜 계량혁명이 기존 지역지리학을 일부 대체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고(이 글 참고), 그 계량혁명의 한계를 지적한 후 도시사회학자와 도시경제학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고 알론소의 입찰지대곡선이 어떻게 도시빈곤문제를 설명하는지 설명한 후, 입찰지대곡선을 가능케 하는 전제를 비판해야 한다고 마무리 짓죠. 거의 현대 사회과학을 한 바퀴 돌아온 것 같은 엄청난 스케일입니다.
이와 같은 엄청난 스케일은 사실 하비 교수 이론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장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은 학문적으로 많은 통찰을 불러 일으키는 좋은 글입니다. 하지만, 학문은 그런 것이 아니죠. 작은 것이라도 뭔가를 ‘밝혀내야’ 하는 것입니다. 조금 과감하게 말한다면, 이 글은 ‘변죽’만 울릴 뿐 도시 공간구조 문제의 본질에는 다가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공간구조를 만들어내야 하는가?", "입찰지대 곡선을 대체할 원리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 거의 답해주는 바가 없기 때문이죠. 그는 쿠바의 사회주택 실험에 대해서 간략히 언급하지만, 앞에서 장대하게 비판했던 스케일에 비하면 너무나 빈약한 대안이죠.
하나 언급해야 할 사실이 있어요. 이 책에서 하비는 앙리 르페브르를 언급합니다. 그의 저작이 도시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되었다고 해요.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르페브르의 '공간의 생산'은 출간 전이었어요. 하비는 프랑스어도 그렇게 잘 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앙리 르페브르의 책 두 권을 인용했지만 '공간의 생산' 아이디어는 아직 접하기 전이었다고 하네요(Harvey, 2022).
'사회정의와 도시'에서 언급한 앙리 르페브르의 책 두 권
하비 교수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거에요. 이 때까지 하비 교수는 발톱을 숨기고 있었거든요. 말하자면 커밍아웃(coming out: 보통 동성애 사실을 밝힌다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이 글에서는 ‘마르크스’ 사상을 존중하고 연구한다는 의미로 사용)을 하기 전이랄까요?
저도 지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 당시 하비의 글에 대하여 한 마디만 얹고 싶네요. 이 글을 쓸 때 데이비드 하비 교수는 30대 중후반 정도가 되었을 거에요. 지금 하비 교수가 80이 넘어서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것을 보면 상대적으로 젊었을 때 쓴 글이죠. 이 때까지만 해도 하비 교수의 생각은 슈퍼맨처럼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저도 조금 더 어렸을 때 저를 생각해보면 이 세상 온갖 이론들이 다 연결되어 있고, 그것들을 다 짬뽕해서 글을 쓸 수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비 교수의 엄청난 독서량과 문화적 소양에는 비할 바가 아니죠.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하비 교수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는 겁니다.
이와 같은 장단점은 나중에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폭발하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또 하도록 하죠.
출처:
Harvey, D. (2022). Reflections on an academic life. Human Geography, 15(1), 14-24. https://doi.org/10.1177/19427786211046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