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 교수는 1982년 『자본의 한계』를 1982년에 출간했고, 머지 않아 1987년 옥스포드 대학 교수로 임용됩니다. 헬포드 맥킨더 석좌교수라는 직함으로 있었습니다. 이 맥킨더는 바로 지리학과라면 한 번쯤 들어보는 ‘심장부 이론’의 그 맥킨더입니다. 우크라이나와 중앙아시아 등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부를 장악하는 국가가 전 세계를 장악할 수 있다는 초기 지정학 이론입니다. 사실 이 이론은 ‘지리학과 제국주의’라는 불편한 조합으로 탄생했지만, 이후 지정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이론이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아이러니 투성입니다. 하비 교수는 영국에 있을 때는 마르크스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마르크스를 읽기 시작합니다. 지금도(2023) 하비 교수는 뉴욕대학교 인류학과 교수로서 마르크스의 ‘자본론’, ‘그룬트리세’ 등을 강의합니다. 자본주의의 심장과도 같은 뉴욕에서 말이죠. 게다가 마르크스 사상가가 되어서 옥스포드로 돌아가 부임한 대학의 이름은 ‘헬포드 맥킨더’이었죠.
아이러니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에요. 2022년에 데이비드 하비는 자신의 학문적 여정을 요약하는 글을 하나 작성했습니다(Harvey, 2022). 하비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저작을 꼽으라면 『자본의 한계』와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두 권을 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더 자주 인용하느냐고 불편한 기색을 내비칩니다.
그는 그의 저작들을 소개하면서 그의 출세작인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조차 하지 않습니다. 2023년 하비 교수가 했던 다른 인터뷰에서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나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큰 주목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썼고, 일부는 농담 삼아 썼다(출처: 인터뷰).
만약 이 인용구만 읽고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읽지 않은 분이 있다면, 만만한 책이라고 보아서는 곤란합니다. 아마 이 책의 한 페이지라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제 말씀을 이해하실 겁니다. 이 책은 하비 교수가 가장 쉽게 썼다고 말하고, 또 부분적으로는 웃으라고 쓴 이야기라고 하는데, 전혀 웃기지 않고, 보들레르, 아도르노, 피카소, 발자크 등 수많은 철학자, 예술가, 문학가들의 예시를 들면서 논지를 전개합니다. 캐스팅이 너무 화려한 나머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헷갈리기조차 합니다.
이 책의 앞 부분이 어렵다고 해서 뒷부분 논지까지 그렇게 어렵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이 글에서는 본격적으로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 대해서 다루기 전에 1970년대 전후반의 상황을 한 번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글에서 비판철학을 소개하면서 1960년대 분위기를 다루었으니, 혹시 60년대 상황이 궁금한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비 교수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던 1969년에 『지리학에서의 설명』을 발간하고, 거의 동시에 존스홉킨스 대학으로 임용됩니다. 당시 전 세계는 68년의 혁명 분위기로 들끓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던 베트남 전쟁은 1973년 종전됩니다. 같은 해, 경제사에서 정말 중요한 일이 일어나는데 그 일은 바로 브레튼 우즈 체제의 붕괴입니다. 1944년 대공황과 같은 파국을 방지하기 위해서 전 세계는 금 1온스에 35달러로 고정환율제를 시행하게 됩니다. 다른 나라의 통화가치는 달러에 고정시켰죠.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전 세계 화폐의 가치를 표준화시킬 수 있으니 대공황과 같이 극도로 경제가 불안정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연합국에서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미국은 생각보다 많은 달러를 사용합니다. 베트남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무기를 구입하고, 또 병력들에게 월급도 줘야만 했죠. 사실 베트남 전쟁만이 유일한 문제는 아니었어요. 우리나라 재건하라고 돈도 빌려줬죠. 그리고 유럽 재건하라고 마샬플랜을 적용했는데, 이것은 쉽게 말해서 유럽에다가 달러를 뿌린 것이나 다름 없어요. 연방은행에 금 보유량이 모자라게 됩니다. 많은 국가들은 달러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돈 줄테니 금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달러를 금으로 바꾸다 보니 금은 모자랍니다.
닉슨 대통령은 1971년 금 태환을 못하겠다고 선언해버렸고, 1973년에는 본격적으로 변동환율제로 변동을 하게 됩니다. 불과 2년만에 금 본위제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이제 화폐시장은 거의 완전경쟁에 가까운 시장으로 변동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각 국가의 화폐 수요와 공급에 온전히 의존하여 환율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전 세계 대부분 국가들은 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 또 하나 중요한 사건이 있는데 바로 ‘석유파동’과 ‘스태그플레이션’입니다. 석유파동은 말 그대로 ‘자원 민족주의’가 발동하면서 석유가격을 담합해서 올린 사건입니다. 이 때 원자재 값이 올라가면서 각국 경제가 휘청하게 되죠. 전 세계 경제가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이 때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물가가 오르면서 동시에 실업률이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자본주의의 황금기가 1960년대라고 한다면, 그 문제점이 폭발한 것이 1968년이었고, 1973년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자본주의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자본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일이 많았던 1973년은 바로 하비 교수의『사회정의와 도시』가 출간된 해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 하비 교수는 『자본론』을 강독하면서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해 더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1970년대는 어쩌면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내리막길을 걸어갈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남아있었습니다. 만능인 줄 알았던 케인즈주의가 더이상 먹히지 않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1990년대 와서는 소련제국이 붕괴해버렸지만, 당시만 해도 소련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미국과 군비경쟁을 하던 시기였어요.
하비 교수는 이 시점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를 했던 것 같습니다. 1982년에 『자본의 한계』가 출간되었으니까요. 회고에 따르면 하비 교수는 1975년과 1976년 프랑스에서 안식년을 보냅니다. 이 안식년은 꽤 중요합니다. 하비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 『자본의 한계』와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라고 할 정도로 파리에 대한 애정을 드러냅니다. 파리는 68혁명은 물론, 빠리 꼬뮌 등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입니다. 하비 교수는 파리에 머물면서 1848년 시민혁명과 1871년 빠리 꼬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과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를 쓰는 원동력이 됩니다.
하비 교수의 한 가지 큰 연구주제가 『자본론』에서 나타난 마르크스의 사상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확장하는 논리적인 이론 작업이었다면, 다른 하나의 큰 주제는 역사유물론적 작업이었습니다. 『자본의 한계』 서문에서 하비가 밝히고 있는데 시간과 공간의 제약 상으로 이 이론의 모든 역사유물론적 근거를 다 서술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비는 『자본의 한계』에서 다소 일반론적으로 서술했던 내용의 역사적 근거를 찾고 싶어 했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나중에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입니다.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가 2003년에 출간되었으니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이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의 예비작 정도 되는 성격이었을 것입니다. 하비 교수는 이 책에 대해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자신의 커리어를 정리할 때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1975년과 1976년 파리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은 쉽게 쓸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하비 교수에게 쉬운 것이지 우리에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하비는 이 책이 크게 주목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농담 삼아’ 썼다고 합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역설적으로 하비 교수를 지금의 하비 교수로 만들어준 책이기도 합니다.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이 하비 교수의 책 중에서 가장 많이 인용이 되고, 가장 많이 판매된 책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자본의 한계』에서 보여준 묵직한 『자본론』에 대한 분석,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에서 나타난 하비 교수의 역사에 대한 식견도 좋지만, 결국 많은 사람들은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나타난 하비 교수의 이론을 많이 활용했습니다. 하비 교수는 왜 그런 작품을 가장 많이 인용하느냐고 다소 불만 어린 시선을 보내지만,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나타난 하비 교수의 생각이 사람들에게는 가장 공감을 불러일으킬 요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공간 압축'이라는 불멸의 수식어도 바로 이 책에서 등장하게 되죠.
다음 시간에는 본격적으로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 대해서 다뤄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