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다뤄봤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데이비드 하비의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으로 바로 들어가보려고 했지만, 아직도 몇 가지 배경지식이 남은 것 같아서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이렇게 배경 설명을 길게 하는 이유는 나중에 또 서술하겠지만,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이라는 책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쉬운 논지의 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듯이 이 책은 결코 쉬운 책이 아닙니다. 철학자, 미학자, 건축가, 미술가, 시인 보들레르 등 수많은 인용구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의 수사를 있는 그대로 다 따라가면서 읽는 것은 상당히 도전적인 경험이 될 거에요.
그래도 우리가 하비의 책으로 곧바로 들어가기 전에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해서 잠깐 다루기는 해야 할 것 같아요. 이와 유사한 주제는 이미 비판철학에서 살짝 다룬 적이 있어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책에서 철저하게 '근대'를 비판했습니다. 근대를 비판한다는 게 도대체 뭘까요?
참고로 근대(modern)는 그냥 '비교적 지금과 가까운' 시대라는 말로 이해해서는 조금 곤란합니다. 철학이나 사회학에서 '근대'라는 말은 제법 특수한 의미를 가지거든요. 그런데 또 근대의 정의가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정도로 명확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어쨌든 논의를 끌고 나가야 하기 때문에 근대를 조작적으로 정의해보겠습니다.
대략적으로 근대는 지금과 같은 경제, 사회, 철학, 과학이 시작된 시기를 의미해요. 과학으로 보면 17세기 뉴턴의 과학혁명 이후를 의미합니다. 경제학적으로 근대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를 의미합니다. 정치적으로 근대는 역시 18세기 후반, 즉 프랑스 시민혁명을 의미합니다. 철학은 조금은 다를 수 있는데, 보통 데카르트 이후 철학을 '근대' 철학이라고 규정합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철학이 가장 먼저 근대를 열었고, 그 다음에 과학이, 그리고 시민혁명과 산업혁명 순서입니다.
근대는 시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것이 중요해요. 경제로 보면 산업 자본주의가 꽃피운 시기를 근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안에 짧긴 하지만, 자본주의에 반대해서 나타난 공산주의(혹은 사회주의) 운동이 있었죠. 과학과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합니다. 이제 드디어 기계가 물건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하고,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땅에는 자동차와 기차가 다닙니다. 이 시기에 인류는 엄청나게 풍요로워졌어요. 뿐만 아니라 근대의 '합리성'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죠.
그럼 인류 문명은 점점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나쁜 것 몇 개만 나열해보죠. 일단 인류의 숙제인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있어요. 아무리 부자가 많이 생겨도 가난한 사람들을 모두 구제할 수는 없었어요. 부자는 기존 농경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었죠. 자본주의의 고질적 병폐인 '양극화'(polarization)이 엄청나게 커지기 시작하죠. 게다가 나쁜 건, 가난한 사람이 부자에게 '반감'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중요해요. 사람들은 "내가 무능해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가난한 사람을 양성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기 시작해요.
위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인 측면도 있었어요. 혹시 엔클로져 운동을 아시나요? 유럽에서 농경지를 사유화하면서 경작을 짓던 농민들이 쫓겨나게 된 사건이에요. 이 농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도시로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초기 자본주의 문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저임금 노동'을 제공하기 시작합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의 공급이 많아지니 당연히 가격은 내려가고 노동의 질은 나빠집니다. 그래서 '노동운동'이 생겨나게 된 것이고, 이 사상이 발전해서 나중에 사회주의 사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기후변화는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야 사람들이 중요한 어젠다로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끔찍한 일들은 이전에도 많이 있었어요. 산업혁명의 본산지 영국에서는 1952년 스모그로 수천명의 사람이 사망한 '런던 스모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뿐이겠어요? 기후는 점점 따뜻해지고, 북극의 얼음은 녹아내리고 있죠.
경제 자체는 어땠나요?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던, 대공황은 자본주의가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운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기차의 끝이 과연 어디인지 아무도 모르는 거였어요. 2차 세계 대전은 이러한 모든 모순이 폭발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일단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 배경 자체가 대공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또 제국주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제국주의야 말로 국내에서 물건이 판매가 안되니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자낳괴(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죠.
2차 대전의 종식 역시 드라마틱합니다. 2차 대전의 종식은 오펜하이머가 만든 '핵폭탄'으로 끝이 났습니다. 민간인을 포함하여 20만명 넘는 사람이 죽었죠. 엄청난 과학의 발전으로 만들어낸 발명품인 '핵무기'가 이제 인류 자신을 향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만약 세계 3차대전이 일어나서 서로 서로 핵을 쏴대면 어떻게 될까요? 누군가 언급했던 것처럼 이제 우리는 '구석기' 시대로 돌아갈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은 예전부터도 있어왔습니다. 근대 문명을 회의한 사람이죠. 많지는 않지만, '니체'가 그런 느낌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니체가 보기에 근대 프로젝트는 '신화'에 불과한 것이었죠. 그리스 신화에서 태양의 신, 아폴로도 있지만, 술의 신, 디오니소스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측면이 인간의 중요한 면을 상징하죠. 니체가 보기에는 서구 문명은 합리성과 힘을 위시한 아폴로적 문명이 지배하는 사회로 보였을 것입니다. 철학에서 디오니소스적 철학을 복구하는 것이 니체의 목표였습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근대'에 해당할까요? 아니면 '탈근대'에 해당할까요? 보기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마르크스의 이론 역시 근대의 산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입니다. 마르크스는 여전히 '이론'을 만들어서 자본주의의 구조를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해버리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19세기는 이론 과잉의 시대였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론으로 세상을 다 설명해내고 싶어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리카아도, 맬서스와 같은 걸출한 학자들이 나오기도 했죠.
아무튼 이미 설명했던 것처럼 '비판철학'은 근대성에 대한 통렬한 비판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항상 비판자들은 '대안이 뭐냐?'는 비판을 듣게 되죠. 실제로 68혁명은 상당히 폭력성을 띄고 있었습니다. 시위대는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했고, 상점을 약탈하거나 물건을 훔치는 등의 일도 빈번했어요.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는 초기에 이 시위를 지지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폭력시위는 지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손절'을 하게 되는 것이죠.
자, 그럼 포스트모던이란 뭘까요? 많은 사람들이 '근대'를 비판해서 이제 '근대'가 뭔지는 알겠는데, '포스트 모던'은 뭐에요? 그게 근대를 '벗어나자'는 것인가요, 아니면, 근대를 '지나가자'는 말인가요? 근대성을 버리고 새로운 뭔가를 찾자는 건가요?
철학에서 포스트모던의 철학을 알리는 지점을 보통 '비트겐슈타인'으로 잡습니다. 이것도 엄청나게 논란이 많을 수 있는데, 아무튼 '비트겐슈타인'은 근대뿐만 아니라 기존의 철학을 완전히 부정해버리기에 이릅니다. 철저한 부정이 있어야 새로운 뭔가를 만들 수 있는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를 통째로 부정해버버립니다. 전기 철학과 후기 철학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부인해버립니다. 그의 주장을 과감하게 요약하자면, '언어는 철학을 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며, 그러므로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해온 말들은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문장은 문법적 오류이거나 동어반복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논리적으로 의미 있는 명제들은 존재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존재할 일이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유명한 문구를 남깁니다.
대략 20세기는 포스트모던과 모던이 혼재한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근대 사고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다면(물론 실제로 뭐가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이 그래도 잘 어울리는 사람은 푸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푸코 이후에 사람들은 '작은 것'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어요. 푸코는 동성애자였는데, 어렸을 때 자신이 의사에게 끌려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 푸코는 사회가 거대한 정신병동처럼 느껴졌다고 해요. 이러한 그의 사고는 나중에 '감시와 처벌', '안전, 인구, 영토'로 이어집니다.
역시 이 위대한 철학자들의 생각을 한 두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포스트모던'은 '근대'와는 다른 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몇가지 특징만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아요. 첫째, 근대의 오만성을 버리기 시작해요. 19세기까지의 사회과학 이론은 인류 문명을 내 이론으로 다 설명해버리겠다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그런 건 가능하지가 않아요. '계몽의 변증법'에서 보았듯이, 근대인들은 합리적인 척 하지만, 사실 인종차별, 빈부격차, 젠더불평등 문제 등에 대해서 별다른 대책도 없이 달려가고 있었어요. 포스트모던에 이르러서 다양한 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근대에서 잊혀지기 일쑤였던 동성애자, 인종문제 등 소수자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소위 포스트 모던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둘째, 합리적 주체라는 환상을 깨기 시작합니다. 데카르트 이후 근대의 계몽 프로젝트는 '합리성'으로 무장하고 있었어요. 합리적인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 근대 교육의 목표가 되었죠. 물론 이것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지금 넓은 의미에서 '근대'를 살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어요. 이것도 참 논쟁적인 말이지만, '포스트모던'은 근대의 여러 모습 중 하나일지 모릅니다. 어쨌든 근대 프로젝트가 기획했던 선형적으로 한가지 목표를 지향해서 나아가던 인간상(ideal type)은 이제 점점 다양한 측면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양자역학 등의 영향도 조금은 있었다고 합니다. 뉴턴의 물리학 법칙처럼 간략한 수학 법칙으로 세상의 운동법칙을 설명해버리는 것이 근대적 사고라면, 전자의 속도와 질량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어서 일종의 '확률' 게임을 해야만 하는 것이 '포스트모던'의 운명이 되었다는 설명도 그럴 듯 합니다.
셋째, 철학이 조금은 가벼워지기 시작합니다. 근대 철학은 인상쓰고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해버릴 기세였다면, 포스트모던 철학은 확실히 조금 더 가볍습니다. 슬라예보 지젝 같은 사람이 대표적입니다. 또 장 보들리야르와 같은 철학자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마음껏 비틀고 비꼬면서 논지를 전개하죠. 심지어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면서 근대인을 재정의하기도 합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을 노동으로 보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본질은 '소비'라고도 말합니다. 소비를 통해서 인간은 정체성을 찾는다는 거죠. 샤넬이나 구찌같은 명품을 착용하는 이유는 자기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라는 거죠. 만국의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자본주의를 분쇄하자던 마르크스 철학보다는 확실히 좀 더 부드럽고, 가벼워진 측면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대략 정리하기는 했지만,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이 이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데이비드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그걸 해버린 거에요. 누가 감히 '포스트모더니즘'을 정의할까 싶었는데, 물론 그러한 시도는 있었지만, 하비처럼 마르크스 이론을 들고 와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건 이런 거다 라고 말을 해버린 거죠.
자, 다음 시간에는 진짜로 하비가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