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David Harvey] 그림 하나로 요약하기

2024-12-01 02:18:11 | 조회수: 16 | 좋아요: 0

지난 1973년 이후 자본주의 겉모습에 격변이 일어났음에 틀림 없다고 나는 주장했다(하비,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237).

이전에 번역의 문제를 지적한 이 글에서 '재현'한다는 말을 다룬 적이 있어요. represent 혹은 representation이라는 단어인데요. 사실 영어로 된 철학 서적을 읽을 때 이 글의 의미만 정확히 알아도 정말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 도식을 알려주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죠. 다시 한 번 보죠.

이 그림이에요. A는 B를 가리킵니다. 언어의 세계에서 이것은 '언어'가 '어떤 사물'(혹은 '개념')을 지칭하는 거에요. 이미 말했듯이 이것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현실은 이데아의 모방이다"라고 했을 때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죠. 정확히 말하면 "현실은 이데아를 가리킨다"가 되어야 겠죠. 왜냐하면 B가 이데아이며 본질이거든요. 이 반대가 아님을 주의하세요! 적어도 서양철학의 전통에서는요.

A에 해당하는 것은 껍데기에요. 껍데기는 껍데기일 뿐, 그 안에 뭔가가 있어야만 해요. 그 알맹이는 B가 되겠어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관념론 철학에서는 A라는 껍데기가 B라는 본질을 가리킨다고 말하게 되는 거에요. 마르크스는 이 사고를 뒤집습니다.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면, "이데아가 현실의 모방이다.", "물질이 정신을 지배한다.",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조건짓는다(condition, 동사)", "경제가 정치를 지배한다", "생산량이 생산조건을 지배한다", 이런 식의 표현이 되는 거에요. 혁명적인 도식이긴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언어에 적용하면 문제가 생기기는 해요.

우리가 이미 배웠듯이 언어는 어떤 생각을 가리켜요(Languages represent ideas). 그런데 이것을 뒤집어 보면, "생각이 언어를 가리킨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에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생각'이 먼저 있고, 그것을 언어가 표상하는 것이지, 언어가 있어서 그것이 생각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런데 꼭 그런가요? 나중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경계마저 허물어 버립니다. "언어가 생각을 지배한다"는 사고를 해버리는 거에요. 이것이 바로 '구조주의'(structuralism) 사고의 출발점입니다. 마치 마르크스가 했던 것처럼 생각을 뒤집어버리는 거지요. 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법이 그 대상을 지배해버리는 거지요. 그 사람의 특성이나 성격 이런 부분까지요. 그래서 언어가 오히려 생각을 지배한다는 사고로 이어지는 것이 구조주의 사고의 출발점이에요.

이러한 사고를 이분법(dichotomy)이라고 합니다. A와 B라는 서로 대비되는 요소를 놓고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게 하는 것이죠. 이와 같은 사고는 모 아니면 도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쟁으로 넘어가는 것이죠.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에도 이 점을 이해하기 어려워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고 슬쩍 말을 바꾸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말을 바꾸면 마르크스의 사상 전체가 말이 안 됩니다. 마르크스는 확실히 '물질'에 꽂혀 있어요. 그의 입장에서 관념(idea)이 물질(material)에 미치는 영향보다 그 반대, 즉 물질의 중요성을 강조한 겁니다.

이 사고는 '변증법적 역사유물론'으로 넘어갑니다. 역사 역시 '물질'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계급'이라는 하부구조(infrastructure)가 '정치'라는 상부구조(superstructure)를 만들어내는 것이죠. 생산량의 변화가 생산양식(mode of production)을 추동하는 것이구요. 그러니까 변증법적 역사유물론이란 이런 겁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싶은 뭔가가 있다고 생각해봐요. 예를 들어 "저 건축물은 왜 저렇게 이상하게 생겼을까?"라는 질문이 있어요. 그럼 역사유물론자는 생각합니다. 건축물을 이루는 것은 어떤 '관념'이야. 그리고 그 '관념'(idea)은 어떤 특수한 "물질적이고 역사적인 조건의 산물"이라고 이해해버리는 것이죠.

조건? 어디에서 많이 듣던 말이 아닌가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이 데이비드 하비의 책 제목이죠. 부제를 보면 "문화변화의 기원에 대한 질문"입니다. 자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여러분은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다 읽은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하비는 사실 제목에서 모든 것을 말하고 있어요.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문화변화의 기원"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 조건이 되는 "물질적이고 역사적인 조건"을 설명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겠죠.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이 책을 다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지난 글에서 이 책의 논지가 쉽다고 표현한 적이 있었어요.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 책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논지는 너무 간단해요. 어쩌면 간단한 내용을 이렇게까지 길고, 어렵게 쓸 수 있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자 그럼 다음의 도식을 보겠습니다.

마르크스 주의자로서 하비 교수의 기본적인 생각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에 영향을 준다'라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티'는 뭐죠? 상부구조이죠. 책을 읽지 않아도 하비 교수는 포스트모더니티는 어떤 특정한 물질적인 역사 전개의 산물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확실하게도 그는 포스트모더니티를 "문화 변화"라고 부제에서 알려주고 있어요. 그의 생각에 "포스트모더니티"는 어떤 특수한 물질적 체계의 산물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비 교수는 1970년,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1973년에 주목합니다. 사실 제가 이 책에서 쓰려고 하는 것과 너무도 비슷해요. 도대체 왜 1969년에 "지리학에서의 설명"을 썼던 데이비드 하비는 왜 1970년대에 마르크스에 심취하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하비의 관찰로는 1970년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문화현상이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걸까요? 이 당시 상황은 이 글에 묘사해 두었습니다.

하비 교수는 지난 시간에도 말했듯이 노골적으로 '조절이론'의 용어들을 가져와서 이 상황을 해석합니다. 조절이론은 중도좌파 쯤 되는 프랑스 정치경제학의 학파(school)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요약하자면, 자본주의는 특유의 불안정성(대공황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듯)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규제(regulation)하는 기구를 만들어 내고, 그러한 규제의 양식을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 '조절' 이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어로 조절은 regulation인데, 조절이라는 번역이 원래 뜻을 잘 전달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하비 교수는 조절이론의 용어를 빌려 1970년대를 기점으로 자본주의는 '포드주의'(혹은 포디즘, Fordism)에서 유연적 축적 체계(flexible accumulation system)로 바뀌었다고 주장합니다. 그 기점에 '오일쇼크'(oil shock, 석유파동)이라는 약간의 우연적인 요소가 있기는 했습니다(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해서 역사의 우연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에요.). 1968년 68혁명과 1973년 오일쇼크를 기점으로 해서 거대한 문화변동이 시작됩니다.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하던 자본주의 체계가 이제는 유연적 축적 체계로 바뀌었기 때문이죠.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넘어간 것이죠.

이러한 변화는 사회 전반적인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소위 말해서 '포스트모던적'이라고 하는 건물들이 1970년대에 계획되고 세워집니다. 그래서 도시에는 '모더니즘'을 상징하는 건물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상징하는 건물이 동시에 존재하게 되죠. 하비 교수의 관점에서 도시와 건축물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것이죠. 그러므로 여러분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한 번 추상해서(abstract) 포스트모더니티(postmodernity)라는 것을 이해해야하고, 포스트모더니티를 조건지우는(condition) 것은 바로 자본주의 체계의 전환이에요. 그 전환은 1973년 오일쇼크를 기점으로 일어났고, 어디서 어디로 전환했냐면, 포디즘에서 유연적 축적 체계로 전환했어요. 이것이 조절이론가들의 설명이었고, 하비는 그 설명을 일부 받아들인 거죠. 하지만, 하비는 동시에 조절이론가들을 실랄하게 비판합니다. 조절이론이 뭔지는 다음 시간에 조금 더 자세히 다뤄보겠습니다.

이 책이 어려운 이유는 처음에 '포스트모던'이라는 것에 대한 각종 정의와 건물, 그리고 표상(representation)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이것은 잘 짜여진 하비 교수의 전략이에요. 앞에서는 알수 없는 것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녀석을 다루고, 자, 그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는 틀을 내가 알려줄게, 그것은 바로 마르크스의 사상이야, 라고 말하는 격입니다. 하비 교수는 모더니즘, 모더니티,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다가 갑자기 136페이지부터 마르크스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포스트모더니티가 마르크스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죠. 그리고 위 글과 도식을 보면 이 책의 요지를 대략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책의 요지를 알고 있다고 해도 여러분에게 이 책을 읽는 기쁨을 빼앗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이 책은 진입장벽이 있기는 하지만, 읽다보면 빠져드는 그런 책이거든요. 소설로 보자면, 어떤 사람들은 "백년 간의 고독"을 엄청나게 재밌게 읽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 책을 읽어내는 사람은 흔하지 않거든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의 쉬운 논지에도 불구하고 이 책 역시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읽혔는가?"에 대해서는 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해한 방식이 옳은지도 명확치 않아요. 그러나 이 책을 읽은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하비 책 중에서 가장 유명한 책이니까요) 이런 방식으로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요약하고 있기 때문에 너무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번에도 잠깐 언급했듯이, 하비는 이 책을 좋아하지 않아요. 내심 "자본의 한계"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같은 작품이 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죠. 왜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은 웃으라고 쓴 책인데, 너무 많은 인용을 하는 것을 살짝 불편하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을 싫어하느냐,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 책이 '포스트모더니티'를 해석하는 하나의 시도였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해석을 과감하게 내놓았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느껴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는 명쾌하게 하비 교수의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한 설명을 들었어요. 그러면 우리는 이제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해서 조금은 더 알게 된 걸까요? 정말 포스트모더니티란 축적 체계 전환(transition)에 따른 문화적 결과물일뿐인 걸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또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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