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David Harvey] 사다리 걷어차기: 하비 교수는 왜 조절이론을 차용했는가?

2024-12-01 02:18:11 | 조회수: 15 | 좋아요: 0

나는 '조절학파라고 알려진 특정한 학문 유파의 언어들을 끌어다 쓰고자 한다...(중략)... 이러한 유형의 언어는 '발견적 장치'로서 쓸모가 있다(163-164).

지난 글에서 우리는 하비가 조절이론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했어요. 오늘은 이론이란 무엇인가 간략히 얘기하고 종속이론, 조절이론 등을 잠깐 짚어보고, 하비 교수가 왜 자신의 책에서 정통 마르크스의 용어가 아닌 조절이론의 언어를 구사했는지 알아보려고 해요.

먼저 이론이란 무엇일까, 잠깐 생각해보아요. 사실 이 내용은 데이비드 하비가 지리학에서의 설명에서 구구절절이 쓰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의 첫 저작에서 그는 지리학에서 그동안 '이론'이라는 것이 어떤 취급을 받아왔고, 앞으로는 어떻게 이론을 구축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이론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theory라는 것입니다. 논문에서 theorize라는 단어도 종종 사용되는데 '이론화'한다고 번역됩니다.

그럼 이론이란 게 뭘까요? 이론이라는 건,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설명(explanation)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해(understanding)하기 위한 것이지요. 예를 들어, "나 왜 이렇게 가난하지?" 이렇게 물어봤을 때 많은 사람들은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가난해서 그래." 아니면, "네가 노력을 안 해서 그래.", 혹은 "자본주의 사회는 가난한 사람을 남겨둬야만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그래." 라고 말하는 격입니다. 그래서 미국 드라마에서 누가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하면, 한 인물이 한심하게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Is this your theory? (그게 니 이론이니?)

느낌이 좀 다르죠. 한국에서 '이론'이라고 하면 뭔가 어려울 것 같고, 심각한 것 같은데, '이론'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어떤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사실 모든 이론은 가설(hypothesis)와 같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련의 검증(test)을 거치면 '탄탄한'(robust) 도구로 인정되는 것이죠. 그것이 통계(statics) 수치(figure)를 가지고 있다면 훨씬 더 괜찮은 이야기라고도 판단될 것입니다. 사실 학문에서 이론(theory)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이론은 서사(narrative) 혹은 이야기(story)와도 닮아 있어요. 하지만, 학문에서는 사실과 정확한 인과관계(causal relationship)에 근거한 이야기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픽션(fiction)과는 다르죠. 하지만, 학문 역시 픽션을 차용하여 설명을 시도합니다.

이야기 하면 뭐가 떠오르나요? 신화(myth)라는 것이 있어요. 신화는 과거에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었죠. "엄마 왜 비가 이렇게 많이 와요?", "산신령님이 화나셨나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말했던 근대(modernity)의 과학적 출발점이 뉴턴이라고 했던 거 기억나시나요? 뉴턴은 '운동법칙'을 통해 세상을 설명합니다. 이제 운동은 f = ma 라는 간단한 공식으로 정의될 수가 있는 것이죠. 이것은 나한테만, 혹은 당신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나아가서 만물 모두에 적용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이론(theory)이 아니라 운동 법칙(lawas of mo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뉴턴의 운동 법칙은 '이론'(theory)이 아니라 법칙(laws)의 지위를 획득한 것이에요.

(신화)----(이론)---(법칙)

이런 순서대로 학문이 발전하는 것이죠. 그래서 학자들은 자신이 세상 만물을 설명하고 싶은 욕심에 빠집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이론은 세상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어." 참으로 여러 시도가 있었어요. 사회생태론자는 사회라는 것은 하나의 유기체(organization)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지금도 "우리 조직(organization)에는 필요한 사람이 있어." 이런 표현을 쓰잖아요. 이런 표현에서 쓰는 organ이 바로 장기, 즉 우리 몸의 간, 콩팥, 위 등을 표현할 때 쓰는 바로 그 단어에요.

경제학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혹시 케네의 경제표라고 들어보셨나요? 경제학에서는 경제를 신체에 비유하여 경제표를 작성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농주의 경제학의 시작이었는데, 나중에 중상주의 경제학과 대립하면서 근대 경제학을 탄생시키는데 일조합니다. 우리가 이미 다뤘던 '노동가치론'(labor value theory) 기억하시나요? 바로 노동가치론이 중농주의에서 왔어요. 중농주의는 '농업'에서 어떤 가치(value)가 생산되고, 생산(production)은 바로 인간의 움직임, 즉 노동(labor)에서 왔다고 생각하게 되고, 이것이 리카아도, 그리고 마르크스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눈치채셨나요? 이론(theory)는 뭘로 이뤄져 있죠? 단어와 개념(concept)으로 이뤄져 있어요. 그래서 근대 이론은 결구 나중에 포스트모더니즘의 통렬한 비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배웠던 바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노동, 가치, 소외, 생산관계, 생산력, 의제자본 등의 개념을 사용했어요. 그런데 사회가 발전하면서 마르크스의 용어로는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 생겨나기 시작한 거에요. 예를 들어 지난 시간에 우리가 다뤘던 "포디즘으로부터 유연적 축적체계로의 전환"이라는 표현은 마르크스 용어로만 그대로 설명하긴 어려워요. 마르크스는 불행히도 '포드'(Ford)의 탄생을 보지 못했거든요.

포드(Ford)는 자동차 회사로서 대량생산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죠. 저도 포드의 인기는 잘 모르지만 예전에 '포드 자동차'는 세계를 휩쓰는 엄청난 회사였어요. 우리는 포드라는 회사를 통해 포디즘(Fordism)이라는 용어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유연적 축적 체계'(flexiable accumulation system) 역시 마르크스의 축적(accumulation)이라는 개념과 유연 체계(flexible system)을 교묘하게 섞은 말이에요.

조절이론(regulation theory)는 마르크스와 케인즈를 결합해서 이런 식의 설명을 하는 프랑스의 학파(school)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절이론의 시조 격인 아글리에타(Aglieta) '자본주의 조절과 위기: 미국의 경험'이라는 박사논문이 조절(regulation)이라는 개념의 시조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리피에츠(Lipets)라는 이름은 하비 책에도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외워둘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조절이론가들은 축적체제, 조절양식, 발전양식, 위기 등의 개념으로 자본주의의 운동방식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공간의 역할을 강조했다는 것이에요. 사실 프랑스의 전통에서 시공간과 영역(territory)는 항상 중요한 화제였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현대 경제학(economics)가 지나치게 과학화를 선언하면서 '시공간'(space and time)을 탈각시켜버린 것을 항상 불만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하비 교수는 매우 전략적으로 조절이론을 자신의 논지를 펼치기 위한 중간 개념으로 선택합니다. 그리고 한 큐에 1973년 자본주의의 변화 과정을 "포디즘에서 유연적 축적 체제로의 전환"이라고 규정짓죠. 하비 교수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조건'을 썼을 당시에 이미 레이건과 대처 등 신보수주의(neo-conservatism)을 본 상태였어요. 그러므로 하비의 도식은 다음과 같이 성립됩니다.

(포디즘)----(1973)----(유연적 축적체계)-->(신보수주의)
(모더니즘)---(1973)-------(포스트모더니즘)

그러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 혹은 발전은 유연적 축적 체계의 등장과 궤를 같이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하비 교수가 이런 전략을 선택한 것은 마르크스의 개념이 현대 경제의 시공간적 변화를 제대로 설명해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한 번 더 다루게 될 '시공간 압축'(time-spatial compression)과 공간적 조정(spatial fix)라는 개념을 만드는 중간 사다리(ladder)로 사용하게 됩니다.

조절학파의 언어가 차선책으로나마 채택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가진 실용적인 지향성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조절학파에서는 이행의 메커니즘과 그 논리를 세밀히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거의 또는 전혀 발견할 수 없다.(225).

그리고 나서 하비교수는 조절이론 학파는 자본주의 본체를 분석하지 못한다고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사다리 걷어차기라고나 할까요? 이미 자신이 원하는 설명을 달성했으니 조절이론의 소명은 다 했다고 보아야 겠죠? 지금도 조절이론이 자본주의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마르크스를 언급합니다. 자본주의 본질은 역시 마르크스가 제대로 분석했다는 것이죠.

마르크스의 이론는 자본주의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물론 하비는 '금융자본', '소비기금', '의제자본' 정도의 마르크스 개념을 동원하여 힘겹게 금융과 지리의 연관성을 연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택 모기지채권(MBS)과 같은 간단한 상품부터 신용부도스왑(CDS), 부채담보부증권(CDO), 합성 CDO 등 복잡 다양해진 현대 금융시장을 다 설명해내기엔 역부족이에요(물론 당시에는 이런 주택금융 파생상품이 지금처럼 복잡하게 진화하지 않았던 때이기는 합니다.). 하비는 금융시장의 성장과 중요성을 언급하면서도 '의제자본'(fictitious capital)과 '금융자본'(financial capital)이라는 개념을 동원할 수 밖에 없는 거죠. 하비 교수의 아래 인용구는 금융자본의 이해에 대해서 하비 교수의 생각이 더 정교해지지 못함을 보여준다고 저는 생각해요.

산업자본 및 상업자본, 토지자본이 금융 기능과 그 구조 속에 점차 통합되어 상업적 이해와 산업적 이해가 어디서 시작되고 엄격한 의미의 금융적 이해가 어디서 끝나는지 구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209).

게다가 현대 경제학은 엄밀한 수학적 증명이 뒷받침되어 탄탄하게 발전해왔는데, 마르크스의 이론은 수학적 뒷받침이 현대 경제학만큼 철저하지는 못해요. 그렇기 때문에 자꾸 새로운 '개념'에 설명을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난점이 생기는 거죠. 그리고 '개념'으로 이뤄진 이론은 이미 우리가 다뤘던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 있습니다.

하비 교수가 조절이론의 언어를 '빌려서' 자본주의 시스템을 분석한 것은 위 인용구처럼 '실용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비는 의외로(?) 실용적인 구석이 있어요.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또 가끔 바보 취급을 받으면서도, 그는 마르크스가 유용하다고 생각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꽤 쿨한 사고 방식이에요.

예를 들어, 케인즈가 위대한 경제학자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에요. 그런데 1970년대 이후의 상황은 케인즈의 완벽한 패배라도 좋을 만큼 위기였어요. 재정사업으로 인한 유효수요 창출은 1960년대 전후 호황경제에서는 그나마 작동하는 줄 알았지만, 1968년의 사회문제, 그리고 그 이후에 펼쳐지는 오일쇼크, 그로 인한 스태그플레이션을 설명해해진 못해요. 물론 경제학이 발전하면서 케인즈 이론이 보완되고, 스태그플레이션을 설명할 수 있는 툴도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케인즈적 처방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었어요.

이제 이론이 설명해줘야 하는 것은 그 다음 부분이었죠. 그럼 이제 자본주의는 어떤 모습을 띄어야 하지? 계속 이 시스템을 가져가도 되는 걸까? 이런 질문들이 있고, 마르크스를 따르는 사람들은 주로 이 질문에 대해서 회의적인 편이죠. 데이비드 하비는 자신의 사상이 '공산주의', '사회주의', '맑시스트' 등으로 불리기 보다 반-자본주의(anti-capitalism)으로 읽혀야 한다고 말한 바 있어요. 대안을 찾아 떠나야 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믿을 수 없을만큼 불안정하고, 위기를 공간적으로 전이시키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버릇이 있는 체제이기 때문이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하비의 실용성을 존중하고, 존경합니다. 하지만 이론의 실천적 기능이 뭘까 하는 생각은 가져봅니다. 자본주의의 '역동성' 혹은 '동학'(dynamics)를 이러저러한 이론이 설명해주는 것은 맞아요. 마르크스도 그 일부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고, 조절이론가들도 일부 설명해낼 수 있었을 거에요. 그 중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에 가까운 사람들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본질'이 있기는 한 걸까요? 그리고 있다면 마르크스가 가장 잘 설명한 것이 맞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각자 생각이 다를 수 밖에 없겠죠?

다음 시간에는 본격적으로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이라는 책을 분해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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