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우리는 '재현'(represent)에 대해서 알아봤어요. 말하자면, 재현이라는 것은 원래 무엇을 가리키다라는 뜻에서 왔고, 공간에 대입하여 보면 '공간의 재현'(공간이 무엇인가를 가리키다), 그리고 '재현의 공간'(사람들의 민의를 대변하기 위해서 공간을 만들어내다)라는 은유까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을 살펴보았죠. 그냥 일상에서 공간을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하비는 '공간적 실천'(spatial practice)라고 부릅니다. 이 개념들은 원래 앙리 르페브르에서 출발해서 데이비드 하비에 의해서 잘 활용되었고, 그 이후 제법 많은 글귀에서 발견이 됩니다. 나중에 소개할 기회가 있겠지만, 하비 교수에게는 두 든든한 동료가 있었어요. 한 분은 닐 스미스(Neil Smith)이고 다른 한 분은 에릭 스윙지도우(Erik Swyngedouw) 교수이죠. 이들은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비롯하여 하비 교수의 서문에도 종종 등장합니다.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은 진짜 쉽지 않은 책이에요. 사실 이 글에서 썼듯이, 아마 이보다 논지가 명확한 책은 드물 거에요. 심지어 그는 그의 주장을 한 문단으로 요약해서 그것을 책 첫 머리에 떡 적어놓기 까지 했어요. 그의 논지란 '포스트모더니티'란 문화 양식의 변동은 1972-3년을 전후로 자본주의의 축적양식의 변동(포디즘 -> 유연적 축적체계)의 변동에 따라서 따라온 일종의 산물이었다는 것이에요. 하비 교수가 꼭 그랬다는 것은 아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은 불편했음이 분명해요.
왜냐하면 일단 그것 자체를 하나로 묶어서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예를 들어, 푸코와 장 보들리야르가 쉽게 포스트모더니즘 하면 떠오르는 학자이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른 걸 주장해요. 그럼 각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자, 라고 생각해보면 그것조차도 엄청나게 의견이 갈릴 거에요. 더군다나 하비가 소개한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알려진 건축물조차도 그것들끼리 서로 어떤 관련을 맺는지 알기가 힘들어요. 철학에서 이것은 '가지론'(알 수 있다!)의 세계에서 '불가지론'(알수 없다!)의 세계로 돌아간 것이나 다름이 없을 수 있겠죠. 생각난 김에 얘기하면 불가지론의 대표적인 철학자는 '데이비드 흄'이에요. 그리고 가지론의 대표적인 철학자는 임마뉴엘 칸트가 되시겠어요.
학교 다닐 때, '윤리' 시간에 데이비드 흄은 경험론의 대표주자라고 배웠을 거에요. 이 흄의 세계관은 아주 독특한데 '베이컨'이 건강한 경험론자라면, 흄은 극단적 경험론자에요. 흄은 경험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사회나 윤리시간에 그 사람의 사상을 한 두 줄로 요약해서 배우지만, 그 사람의 생각은 생각보다 심오하지요. 흄이 딱 그런 사람이에요(생각해보니까 이 사람도 '데이비드'고, 영국 사람이고 데이비드네요(엄밀히 말하면 스코트랜드). 이 사람의 생각도 정말 재밌어요. 얼마 전 하이브의 방시혁 의장이 텔레비젼에 나와서 세상의 본질은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아마 데이비드 흄보다 더 이 말에 적합한 사람은 없을 것 같아요.
흄의 생각에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감각 자료(sensory data)뿐이에요. 예를 들어 공기가 어디에서 울리면 그 울리는 것이 공기라는 매질로 전달되고, 우리는 고막의 흔들림을 통해서 소리라는 정보를 얻어내고, 그 소리는 뉴런을 통해서 뇌에 전달됩니다. 뇌에서는 그 정보를 받아들여 호르몬을 생성하기도 하고(기뻐서, 혹은 슬퍼서), 아니면 어떤 행동을 취하도록 명령을 내리기도 합니다. 뇌라는 것은 나중에 또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행동을 통제하는(control) 기관"이죠.
자자자! 그럼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그럼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세상에 대한(data about the world) 자료를 가진 것은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렇다면 '그 세상'은 어디에 있는 것이죠? 플라톤 식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그림자'(shadow)만 본 것이지 세상을 본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흔히 육감(sixth sense)라고 하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요? 그러니까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다섯가지 기본적인 자료는 우리가 어떤 루트로 입력되는지 잘 알지만, 여섯번째 감각, 즉 세상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하냐 이거죠. 이런 능력은 결국 다시 신비(myth)의 세계로 넘겨져 버립니다. 현대 과학은 육감이 없다는 것이 아마도 공식 입장일 거에요. 그런 면에서 과학은 신화를 대체한 측면이 있죠. 하지만 이미 배웠던 비판철학에서 살펴보았듯이 근대성(modernity) 역시 이러한 확실성의 신화(myth)에 근거하고 있어요.
하이브의 방시혁 의장은 이 영상에서 '불가지론'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각각 다른 정보를 접하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논리로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얘기였어요. 그리고 프로듀서이자 뮤지션인 박진영이 그 이야기에 매료되었다는 느낌의 이야기였었지요. 방시혁 의장이 '미학과'를 나왔잖아요. '미학'이야 말로 사실은 철학 중에서도 난이도가 극강인 부분이기도 하고,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면, 방시혁 의장은 데이비드 흄이나 이어지는 발터 벤야민, 미셸 푸코, 데리다, 라깡 등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을 줄줄 꿰고 있었을 거에요. 미학과 대학원을 나온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엄청 잘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요(하긴 미학과 대학원을 나왔다고 해서 '미학'에 대해서 잘 아느냐, 하는 것은 조금 별개의 문제이긴 합니다).
방시혁 의장의 말은 사실 포스트모더니티의 철학을 말한 것과도 같아요. 얘내들은 서로서로 자기들끼리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공통점이 없어 보이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자'는 이야기를 하거든요. 이것은 '모더니티'의 사고에 익숙한 사람이 보면 참으로 답답한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답'이라는 것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니야? 누가 더 맞는지 대봐야 하는 것이 아니야? 우리 인류는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알게 되었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만들어서 세상을 잘 이해하게 되었잖아. 응?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은 GPS에서 시간과 거리 오차를 계산할 때도 사용되지만, 동시에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에도 사용이 되었죠. 그럼 그 잘난 '근대성'(modernity)의 결과라는 것이 결국 인류를 폭망하게 할 원자폭탄이라는 이야기야? 이런 말도 성립이 되겠죠.
다시 불가지론으로 돌아와 보죠.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은 '불가지론'이라고 부르기에는 또 애매한 측면이 있는데, 아무튼 불가지론의 이야기를 끝내 보자구요. 아마도 세상에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있을 거에요. 그것을 편의상 존재(being)이라고 불러봅시다.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읽을 분은 아시겠지만, 생성(becoming)이라는 개념도 나중에 등장하기 때문에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어요. 문제는 우리가 우리 외부의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냐는 거에요. 그것이 바로 인식론(epistemology)이라는 학문 분야가 되는 것이에요. 흄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감각정보라고 보았고, 그 감각정보는 개별적 data일 뿐이지, 세상 그 자체를 알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에요.
자자자, 예를 들어 보자구요. 우리는 별을 봅니다. 반짝 반짝 작은 별... 별은 반짝반짝 빛나죠. 하지만, 별은 사실 빛나기는 하지만 반짝반짝 빛나지는 않아요. 별이 내뿜는 빛이라는 시각정보가 '대기'라는 매질을 거치면서 우리 눈에 들어올 때에는 흔들거리면서 들어오는 것이에요. 수만년동안 인류에게 별은 그냥 반짝반짝 하는 존재에요. 누구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죠. 그런데, 말입니다. 최근 우리는 천체물리학에 대한 지식이 깊어지면서 별이 반짝이는 것이 '대기'를 통해서 정보가 오염(contaminated)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수만년 동안 인류가 별의 본질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죠. 이 정보는 근대에 '수정'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지 못하고, 접하지 못한 수많은 것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채워넣을 수 밖에 없어요. 그러면서 우리는 '외계인'도 만들어 내고, '뽀로로'도 만들어내는 등 소위 "예술"이라는 것이 탄생하게 됩니다. 방시혁 의장이 미학과 91학번이죠. 아마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열심히 했나 봅니다. 확실히 불가지론은 미학과 맞닿는 측면이 있어요.
데이비드 흄은 한 가지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감각하는 나를 감각할 수 있느냐?" 즉 주체성(subjectivity)에 관한 문제에요. 어어어?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요? 바로 러셀의 역설, 스스로 이발하지 못하는 이발사의 이야기에 관한 것이었어요. 흄은 아무리 노력해도 '감각하려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토로합니다. 그러니까 근대 철학은 인식론의 덫에 빠져버린 것이요. 세상을 인식조차 할 수 없는데, 거기에 존재가 뭔지, 가치가 뭔지 알게 뭐에요? 일견 흄의 불가지론은 포스트모더니티와 강력한 연결고리를 가지는 것 같습니다. 실제 방시혁 의장도 그런 느낌으로 말하는 것 같아요. 흄이라고 딱 찝어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요.
데이비드 흄의 불가지론 역시 인간은 포스트모던의 세계로 안내할 것만 같아요.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이러니입니다. 흄의 불가지론을 극복하기 위해서 서양철학에서는 '가지론'이 발달합니다. 가지론의 대표 주자는 '임마뉴엘 칸트'에요. 칸트는 이미 여러 차례 다뤘지만, 인간에게 '선험'(a priori)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 선험에 대해서 생각해보자구요. 선험이란, 넓은 의미에서 '먼저 한 경험'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블루투스 스피커를 한 번 써 본 경험이 있다면, 그것이 '블루투스 스피커'라고 인식할 수 있어요. 90년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서 블루투스 스피커를 사용한다면 그 사람들은 깜짝 놀라겠죠.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선험' 덕분이라고 말해도 됩니다. 여기에서부터 데이비드 흄의 극단적 경험주의가 사실 조금씩 무너질 준비를 합니다.
우리는 데이터를 쌓아 가면서 세상을 인식합니다. 구석기시대에 '별이 반짝인다'라는 정보가 있었다면, 지금은 '공기라는 매질에 의해서 별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별은 일정한 빛을 내뿜는다'라는 정보를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런 식으로 인류는 지식(knowledge)을 축적(accumulation)하면서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혀갑니다. 여기에서 칸트는 한 발 더 나아가 조금은 논란이 있을 것 같은 주장을 합니다. 인간은 기본적 '선험'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그 선험은 바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이라는 것입니다. 즉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인간은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인식하고, 공간을 지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때 말하는 공간은 지리학에서 흔히 말하는 '지역'과는 좀 다릅니다. 어떤 '조건'(condition)으로서의 시간과 공간을 의미하죠.
우리는 선험이 있기 때문에 세상을 인식할 수 있고, 세상을 인식하면 결국 세상이 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죠. 저는 개인적으로 흄은 정직했고, 칸트는 다소 멀리 갔다고 생각을 합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금은 이상한 단어를 가져와서 불가지론을 엎어버린 거에요. 좀 심하게 말하면 비약이라고까지 느껴져요. 왜냐하면 갓난 아기가 '선험'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누구도 증명할 수 없고, 그럼 선험은 또 어떻게 주어지느냐 하는 문제도 생기거든요. 어쨌든 칸트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근대 철학을 구해냅니다. 그리고 이 시간과 공간은 나중에 마르크스에 가서도 '시간에 의한 공간의 소멸'(annihilation of space by time)이라는 엄청난 메타포를 만들어내고, 하비에 이르러서는 시공간 압축(time space compression)이라는 불멸의 개념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릅니다.
아까 제가 흄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원조로 분류할 수 있는지 잠깐 생각을 해봤는데 결론은 그렇지는 않는 것 같다는 것이었어요. 니체는 확실히 그런 측면이 있어요. 니체는 합리성에 대한 예찬이 일종의 '신화'에 근거한다는 것을 이미 눈치챘었어요. 그리고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도 등장하지만, 니체는 확실히 포스트모더니티의 생성과 관련이 있어요. 일부 사람들은 니체의 '초인' 사상을 나치의 출현과 연결시키기도 하는데, 그건 다소 상상력의 과잉이 아닌가 싶기는 합니다. 아무튼, 흄은 오히려 '모더니스트'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그 이유는 흄의 사상은 결국 '경험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경험론은 나중에 '물질론',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유물론과 연결되면서 마르크스 철학의 기반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대륙의 '관념론'이라는 표현을 쓰지요. 그 때 관념론의 대가는 누가 뭐라 해도 데카르트, 칸트, 헤겔이지 않겠어요? 관념론 역시 마르크스 철학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이기는 합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결국 헤겔의 변증법으로부터 나왔으니까요. 물론 마르크스를 연구하는 철학자들은 방금 이 문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르크스가 헤겔을 뛰어넘어서 독특한 뭔가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마르크스 철학의 기반은 독일 관념론, 영국 경험론, 그리고 경제학적으로는 고전경제학파의 노동가치론이 적절하게 섞여 있어요.
하비는 마르크스가 '모더니티'를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라고 묘사합니다.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에요. 모더니티의 요체는 누가 뭐래도 자본주의이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평생 연구한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마르크스의 사상을 따라서 공산주의 혁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떻게 느껴졌을까요? 예를 들어 방시혁 의장이 혁명가를 만난다면, 뭐라고 말할까요? "세상에는 논리로 설득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그러니까 네가 세상에 대해서 하는 생각도 하나의 생각일 뿐이야.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구." 혁명가는 속이 뒤집어지겠죠?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납니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잉? 서로 생각이 다른 데 어떻게 단결하죠? 근대는 여기서 '해체'의 수순을 밟기 시작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개개인의 니즈(needs)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이제 동성애자, 장애인, 그리고 소외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죠.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 숙제가 자신의 성 정체성(sexual identity)일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자신의 '신체 능력의 부족'이 평생 숙제일 수 있겠죠. 더 이상 계급으로 세상을 나눠서 자본가들에게 대항하는 논리가 설립하지 않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을 드라마틱하게 한 문구로 요약하면 바로 '포스트모더니티'가 되는 것입니다.
마르크스 사상의 입장에서 이 '포스트모더니티'는 답답합니다. 왜냐하면 이것 자체가 계급투쟁의 동력을 무너뜨리거든요. 그래서 자유란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ideology)일 뿐이다, 라는 식으로 말을 하기도 합니다. 데이비드 하비의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역시 비슷한 측면이 있어요.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해서 데이비드 하비의 일관적인 입장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비 교수는 '시공간 압축'이라는 기가 막힌 프레이즈(phrase)로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설명해냅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제가 말한 것은 엄청난 요약에 불과하고, 직접 책을 읽어봐야 합니다. 책에는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논증을 통해서 이 쉬운 논증을 해나갑니다.
요약하자면, '포스트모더니티'란 제각각 다른 니즈가 있는 개인이 서로를 합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하비 교수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물질적 변화(자본주의의 변신)으로 설명하면서 포스트모더니티를 마르크스 철학으로 '설명해낼 수 있다'고 말한 것이었어요.
하비의 설명은 참신하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대변한 것 같다는 느낌도 들어요. 사실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도 '포스트모더니티'란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이것 역시 포섭해야 혁명으로 나아갈 수 있거든요.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를 포섭할 수 있는 명분을 설명해준 셈이죠.
다음 시간에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 대한 반론을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