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데이비드 하비 시리즈 1부(사회정의와 도시, 자본의 한계,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를 마무리하며

2024-12-01 02:18:11 | 조회수: 13 | 좋아요: 0

지난 글에서 원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글항아리 버젼)을 읽기로 하고 글을 마무리했습니다. 사실 이 글의 원래 기획은 '데이비드 하비'의 생애와 사상을 이런 저런 역사적 조건과 함께 풍부하게 공부해보자는 데 있었습니다. 그 기획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소설가들이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캐릭터들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요.", 이 때는 "캐릭터들이 하는 말을 받아적으면 된다"고 합니다. 신기한 경지이죠. 가상의 캐릭터를 어떤 환경에 두면 그 캐릭터가 할 법한 말이 정해져 있겠죠. 그리고 그 대사는 다른 캐릭터의 반응을 이끌어냅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작가가 원래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이 시리즈를 쓰면서 저도 비슷한 것을 겪었습니다. 하비 교수의 박사논문이나 '지리학에서의 설명'(Explanation in Geography)는 너무 정보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남들도 알 것 같은 이야기 밖에 쓸 수 없었어요(하지만, '지리학에서의 설명'(Explanation in Geography)은 아마존에서 원본을 샀기 때문에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라든지, 칼포퍼의 과학철학 등의 내용이 보강될 겁니다. 2023.12.31 기준). 그런데 '자본의 한계'와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은 번역본과 원본이 있고, 쓰다 보니 정말 수많은 배경지식을 만나게 되었어요. '사회문제와 도시'의 경우 번역본은 없지만, 원서가 있기 때문에 도대체 하비 교수가 1973년 맑스를 공부하고 나서 어떤 느낌이었는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이 경험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대략적으로 데이비드 하비가 '지리학에서의 설명'(1969)에서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 이 표현을 선호하지 않지만)를 집대성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 책에서 하비의 생각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다룬 글은 만나기 힘들었어요. 이 책의 서문만 보더라도(물론 저는 서문만 보지는 않았지만), 피터 하게트, 리차드 촐리, 왈도 토블러 등 정말 중요한 지리학자들과 하비 교수가 교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어요. 뿐만 아니라 그 때 하비 교수는 거의 혁명적(revolutionary)이라고 할 정도로 자연과학적 방법론이 지리학 연구의 새로운 길이라고 느끼는 듯 합니다. 이 과정이 그냥 단순히 '자연과학적 방법론의 도입' 차원이 아니라 지리학에서의 '법칙', '이론', '패턴'이 무엇이고 이것들이 자연과학 방법론을 만나서 어떻게 발전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비의 후속 저작들보다 이 책이 가장 논리가 명확한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비 교수가 존스홉킨스 대학으로 부임하면서, 영국에서 미국 '볼티모어'로 이사하고 1968년 혁명의 향기를 맡게 된다는 것은 그의 학문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해줍니다. 사실상 이 때 '마르크스 사상가'로서 하비의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시기입니다. 하비 교수는 인터뷰나 개인 회고에서 이 시기를 종종 언급합니다. 당시 1968년 볼티모어에서는 심각한 폭동이 있었기 때문에 이 뒷수습 역시 중요한 아젠다였습니다. 사회과학자들이 모여서 볼티모어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고, 또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조사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고, 데이비드 하비는 그 연구에 참여합니다. 이 때 당시 하비 교수는 처음으로 마르크스를 읽게 되었는데, 도시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개념으로 볼티모어의 주택시장을 설명했더니, 반응이 무척 좋았다고 합니다. 하비 교수는 일부러 그것이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숨겼다고 합니다.

하비 교수는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자본론 1권' 강독을 시작합니다. 몇 년이 지나고 하비 교수는 1973년 '사회정의와 도시'를 출간하게 되었어요. 고백하건대, 저는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시간 내서 뒤적이면서 읽어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조금 놀란 것은 하비 교수가 당시 '지리학에서의 설명'을 쓴 석학 답게, 당시까지의 입찰지대론 이론을 충실하게 공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부동산학 교과서 등에 알론소의 도시 입찰지대론을 언급하지만, 입찰지대론과 게토과 무슨 관계인지, 알론소가 훌륭하게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거든요. 하비 교수는 알론소의 입찰지대론을 훌륭하게 요약해내고, 그것보다 더 나아간 대안이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바로 입찰지대론의 폐기(?)이지요.

이 때까지만 해도 하비 교수의 마르크스에 대한 깊이가 그렇게 깊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비 교수는 '사회정의와 도시'에서 마르크스를 엄청나게 추켜세우고 있어요.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룬 하비의 용어는 그다지 정교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사상은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정말 깊고 넓기 때문에, '공간'과 '지대'라는 일부 주제만 가지고 마르크스를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하비 교수는 1982년에 본격 마르크스 이론서를 냅니다. 그것이 바로 '자본의 한계'이지요. '자본의 한계'는 하비의 이론 체계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자기 방식대로 요약해 내고, 지대론을 거쳐, 고정자본, 신용, 화폐, 금융, 공간까지 마르크스 이론을 확장합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공간적 조정'(spatial fix)라는 개념을 만들어냅니다. 그동안 마르크스는 '역사-유물론'이라고 명명되었다면, 하비에 이르러서는 '역사-지리 유물론'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죠. 이 책은 앞으로 나오게 될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에서 다루게 될 개념과 이념적 토대가 제공됩니다.

하비 교수가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에 다시 돌아와서 쓴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은 여러 모로 의미가 있는 작품입니다. 하비 교수가 그동안 공부해온 지식의 양이 폭발한 작품이기도 하고,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의 비교적 단순한 논지 때문에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작품이기도 하죠. 심지어 포스트모더니티의 미학을 설명한다면서 여성의 나체 이미지를 수록했는데, 이 부분에서 불만을 표시한 여성 독자들도 있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을 해설한다는 것은 고약하지만 흥미로운 작업입니다. 먼저 하비 교수의 글 치고, 쉬운 글은 없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엄청나게 많은 배경지식을 동원하여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나가는 것이 하비 책의 특징입니다.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은 논지가 명확한 책이라고는 하는데, 논리를 따라가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보들레르, 플로베르, 발자크, 발터벤야민, 푸코, 료타르, 비트겐슈타인, 다니엘 벨, 하버마스 등 철학자와 문학자 이름이 쏟아집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결론에는 '마르크스'가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모더니티'를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며, 마르크스가 이해한 방식이 옳다고 하비는 주장합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이 시대를 살지는 못했기 때문에 하비에게는 중간 개념들이 필요했어요.

하비 교수는 그 중간개념을 '조절학파'에서 차용합니다. 조절학파란 1970년대 프랑스의 아글리에타, 리피에츠 등 몇몇 정치경제학자들의 주장으로, 자본주의의 조절양식(mode of regulation)을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하비는 '포디즘', '유연적 축적체계'라는 이들의 개념을 가져와서 '포스트모더니티'라는 문화변화를 설명해냅니다. 느슨하게 말하자면, 물적 조건이 포디즘에서 유연적 축적체계로 이동하면서 '모더니티'가 '포스트모더니티'로 전환하였고, 그 원년은 1972년쯤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과정에서 하비 교수는 '시공간 압축'이라는 기가 막힌 프레이징을 만들어냅니다.

사실 글을 시작할 때, 과연 내가 '하비 교수'의 사상을 끝까지 따라가면서 요약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 있었습니다. 하비 교수의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도 벅찬데, 그것을 요약하고 정리해서 남들에게 "이것이 하비 교수의 생각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또 하나 어려움은 하비 교수의 생각이 나이가 들면서 계속 변화 발전한다는 점이었습니다. 하비 교수는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에서 역사지리 유물론적 방법론으로 파리를 조사합니다. '희망의 공간'에서는 유토피아와 신체의 문제를 다룹니다. 나중에는 '도시에 대한 권리'로 관심사가 옮겨갑니다. 결국 하비가 천착하고 싶은 것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드러내면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모두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려면(그것도 이해할만한 설명과 함께), 최소한 이와 같은 책이 몇 권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이번 시도는 여기까지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하비 교수 자신은 '자본의 한계'와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가 자신의 저작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만, 가장 많이 인용되는 책은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이거든요. 그리고 제 설명은 20세기 역사에서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어진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해체로 인한 자유주의 진영의 승리까지가 딱 적절해 보입니다. 그 이후 펼쳐진 아시아의 국지적 경제위기, 미국의 신경제(new economy), 미국발 금융위기, 유럽의 재정위기,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 등의 문제는 다른 맥락에서 한 번 다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비 교수의 생각이 변화하게 된 중요한 기점에는 1968년 혁명이라는 세계사적 변동이 존재했고, 그 이후 케인즈의 처방이 먹히지 않기 시작한 1972년 석유파동부터 하비 교수의 마르크스 이론이 무르익는 시기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하비 교수의 사상은 '마르크스'라는 큰 뿌리에 기대고 있으며, 마르크스의 사상은 사회, 정치, 경제, 철학, 문학, 예술 등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깊고 넓습니다. 그 중 '공간경제'라는 부분에 있어서 설명할 도구를 만들었다는 것이 이 시기의 하비의 빛나는 업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앞으로 후대에서 그러한 설명들이 얼마나 오래 살아남는지 시간이 검증해주겠지요.

일단 하비의 연재는 여기까지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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